(이어지는 글입니다.)
참고자료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I (해방 이후 20세기 말까지) /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남북교회 교류를 통한 통일선교 과저 / 조은식(숭실대학교) / 장신논단 제21집, 2004.6 P.331-354
북한 지역 기독교의 역사
[목차]
1. 조선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서양 종교의 전래
1-1 서학(카톨릭), 서북지방, 계급사회의 타파
1-2 토마스의 순교
1-3 존 로스 선교사와 성경번역, 권서
2. 동양의 예수살렘, 대각성운동(원산, 평양)
3. 해방과 한국전쟁
4. 변화하는 북한교회(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교회의 생존/생성/정착)
4-1 사회주의 속의 생존 모색(1950~60년대)
4-2 사회주의적 교회의 생성(1970년대)
4-3 사회주의적 교회의 정착(1980년대~)
5. 넓어지는 선교의 지평(남북한 교회의 새로운 연합 가능성)
6. 21세기 한반도 평화의 씨앗
4. 변화하는 북한교회(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교회의 생존/생성/정착)
4-1 사회주의 속의 생존 모색(1950~60년대)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개신교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민족 의식의 고취와 사회 개혁 등 직-간접적인 독립 운동에 앞장 섰음에도, 한편으로는 강압과 회유에 못이겨 신사참배를 결정하거나 그것도 모자라 적극적으로 부일 행각을 벌임으로써, 해방 후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교회 내 '친일 청산'이 잠재적인 과제로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6.25전쟁을 겪으며 남-북의 교회는 각자의 상황 속에서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남한의 교회는 과거 청산 문제를 포함하여 신학노선의 차이와 교권 다툼 등으로 갈등이 폭발하던 시기였지만 한편으로 친 기독교적인 이승만 정부의 힘을 입어 남한 사회의 재건에 리더 격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북한의 교회들은 남한의 교회들 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전쟁 기간동안 종교시설이 철저히 파괴 되었음은 물론, 전쟁 피해 복구에 전인민이 총동원 되고 나라 전체가 사회주의 국가로 재편되는 가운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종교허무주의'나 '기독교는 증오의 대상인 미국의 종교'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어 신자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밝히기 어렵게 되면서 과거와 같은 신앙생활은 점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1958년에 이르자 피해 복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고, 기독교를 포함한 여타 종교인들 역시 이에 동참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1959년은 북한 정부가 발행한 반종교 책자들이 정점을 이룬 시기였으며,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태도를 결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지 않으려 했던 이들은 작은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려 했지만, 머지 않아 그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한편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한 감리교 목사 홍기주와 장로교 목사 강량욱(김일성의 외종조부)를 포함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남북연석회의에 기독교민주동맹 대표로 참석했다가 남한의 단독 선거 및 정부수립에 반대하여 북한을 선택한 감리교 목사 김창준,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 등이 있었으며, 감리교 목사 이풍운의 경우 6.25전쟁 후 교인들과 함께 있기 위해 월남을 거부하고 함께 협동농장을 만들어 지도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전쟁 후 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를 '종교 말살정책'의 시기라 부릅니다. 1960년대 사회주의의 '황금기'를 지나면서 종교를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북한 당국의 자신감의 표현으로, 조선로동당 정치국은 안신호와 강선녀(김일성의 외척) 등 저명 인사와 당의 간부급 인사 부모들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허락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개인적으로 신앙을 지켜왔던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의 적대적인 계급으로 분류되어 불이익을 당하며 살아오다가 이 시기에 이르러 서로 연결되며 가정예배로 조직될 수 있었습니다.
4-2 사회주의적 교회의 생성(1970년대)
1972년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 남한에서는 ‘유신헌법’이 만들어졌고, 북한은 그 해 12월 새로운 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였는데, '주체사상'의 유일한 해석자인 김일성 '주석'에게 절대권위를 부여함으로서 인간중심론적 주체사상이 형성되었고, 종교 역시 필요에 따라 통일전선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시기 북한은 남북대화가 본격화 되고, 서구 세계와의 경제교류를 통하여 변화하는 국제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힘 쓰던 시기가 되자, 외부적으로는 국제적 기독교 단체에 참가하거나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중앙 종교 조직의 활동을 재개시킵니다. 평양신학원이 1972년에 개원하였고,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남한 정부의 조치를 비난하면서 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회(이하 조기련)라는 조직이 등장합니다. 평양신학원은 한 기당 입학생 수가 10여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체제 내에서 기독교가 유지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계기가 되었으며, 조기련은 세계교회협의회나 기독교평화회의 등 국제적 기독교 단체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당시 북한의 종교 정책은 일관적이지 않았지만, 향후 종교를 통한 대남투쟁을 염두에 둔 조치라 이해됩니다.
해외의 기독교 단체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자 외국에 거주하는 진보적인 한국계 기독교인들이 북한 기독교와의 교류를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1981년 11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4-3 사회주의적 교회의 정착(1980년대~)
해외의 기독교 단체들과의 교류와 국제 환경의 변화로 인해 북한 정부는 서서히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였으며 종교관 역시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종교정책을 바꾸기 시작했으며, 남한기독교인들과 회의와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주체사상가들은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83년 찬송가와 신약성경이, 1984년에 구약성경이 출판되었는데 남한의 '공동번역'을 참고하여 조선문화어 표기법에 따라 개역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북한에는 20여명의 목사와 1만여 명의 기독교인, 그리고 약 520개의 가정교회가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1만여 명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조기련에 가입하여 공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수가 약 6천명 정도 되었지만 아직도 정부의 간섭 없이 개별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만여명이라는 숫자는 2000년대 들어서도 거의 변하지 않아 더 이상 새로운 교인이 추가되지 못하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 시기 북한 사회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그간 종교탄압을 위한 '독소조항'으로 알려져 왔던 '반종교적인 선전의 자유'가 1992년 개정된 북한 헌법에서 삭제된 점인데, 반종교 선전 역시 축소되는 대신 주체사상의 관점에서 종교가 체계화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1988~89년에는 북한 기독교 역사의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이 여럿 있었습니다. 우선, 1988년 10월과 11월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각각 문을 열었는데, 봉수교회는 그동안 북한과 접촉한 한국과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교회건립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도 15만 달러를 지원한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중 3만달러는 남한교회가 비밀리에 헌금하였다죠) 우리는 그동안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에 매우 민감할 수 밖에 없었지만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사회에 종교시설이 공식적으로 세워짐으로 인해 그들은 정치적인 용도로 사용할지 몰라도 외부 세계와의 창구 역활과 내부적으로도 북한 지역 기독교 신앙의 맥을 이어갈 의미있는 장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북한 당국과 인민들이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문익환 목사, (천주교 신자) 임수경, 문규현 신부의 방북이었습니다. 남한의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고 1989년 3월과 6월에 각각 방북한 이들이 북한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더구나 기독교인인 이들이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에 가서 발언하거나 예배드리는 장면이 북한의 텔리비젼을 통해 방영됨으로 인해 북한 내부적으로도 크게 홍보가 되었고, 개신교에 비해 활동이 미미했던 북한 천주교를 '부활시키는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남한의 종교인들의 민주화나 통일 운동이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 언론을 통해 소개되고 있었지만, 남한의 개신교 목사가 김일성과 만나고 통일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장면도 그렇고,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가깝게 목격한 남한의 젊은 학생 임수경이 보여준 종교적인 행동은 성직자인 문익환과 문규현과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남한의 기독교인 가운데 고난을 무릅쓰고 통일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그간 북한에서 교육시켰던 기독교에 대한 평가와 상충되기도 했죠. 앞에서 설명했듯 1992년의 헌법 개정을 포함하여, 1988년 김일성 종합대학에 종교학과가 설립되고 이듬해 부터 기독교 전공이 설립되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표면적인 변화가 곧바로 북한 사회의 개방으로 연결된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박승덕은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공존 가능성을 가장 논리적으로 설파하였던 사람으로,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기독교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며 인간구원과 인간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습니다. 로마에서 처음 국교화된 기독교가 착취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고 피착취계급의 자주성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이천여년간) 해왔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 기독교는 '기독교 본연의 자세와 사명에 맞게 점차 민중의 편으로 돌아서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현세천국, 현실참여, 사회구원 등에 대한 현대 신학의 관심을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전통적 유물론의 한계를 비판한 후, 사회적 집단의 생명은 무한하다는 주체사상의 집단주의적 영생관이 기독교의 영생을 포괄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박승덕, “기독교에 대하는 주체사상의 새로운 관점”)
한편 북한 기독교가 해외의 기독교 단체들과 교류하기 시작함에 자극을 받은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는 남북 통일문제를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제안하였고, 마침내 1984년 가을 고텐바에 있는 일본YMCA의 도잔소(東山莊)에서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가 개최한 도잔소협의회가 열리게 되는데 우리나라 통일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회의의 원 제목은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평화와 정의-분쟁의 평화적 해결' 이었는데, 북에서는 대표단 참석이 어려워 회의를 축하하고 성공을 비는 전문만 보냈으며, 남한 교회에서도 당시 '통일'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어 주체측과 협의하여 제목과 발표문 등을 수정하였다고 합니다. 남북교회가 함께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이 때를 계기로 2년 뒤인 1986년 스위스 몽트뢰 근교에서 개최된 글리온 대회에서, 남북한 교회 대표들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후, 몇번의 국제대회에서 만남이 계속 되다가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가 북한을 방문하여 봉수교회의 부활절예배에 참석하는 계기가 됩니다.
5. 넓어지는 선교의 지평(남북한 교회의 새로운 연합 가능성)
1972년 남북 간에 '7.4 공동성명'이 체결되기 이전까지, 남한 교회에서의 통일 논의는 몇몇 진보적 기독교인 개인 차원에서 다루어진 문제이고, 심지어 남한 사회에서 자유와 사회정의를 구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하자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7.4공동성명 이후 통일 논의에 시민사회도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지기 시작한 이후, 1980년대에 들어 남한 교회의 진보 세력은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함께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1986년 장로교(예장통합) 측에서 선포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는 분단이 지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중략)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민족 화해와 평화 정착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고백함으로써 (남한) 교회의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먼저 민족통일 문제를 언급하였습니다.
이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선언문'에서는 평화체제의 수립과 주변국이 보장하는 전제로 미군철수와 군비축소등의 주장도 언급을 하였는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등 보수 단체들은 즉각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전개된 선교신학의 양극화 현상은 계속 이어져오게 됩니다. 진보진영은 한국의 반공적 기독교가 통일의 길을 차단시켜 왔다고 비판한 반면, 보수 진영은 기독교인들의 전투적 반공 활동을 국가에 대한 교회의 중요한 봉사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인식의 차이는 한국 기독교 내에서 두고두고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상황은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남한) 사회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은 기독교 시민 단체나 종교 단체 등 민간분야에서 북한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 해외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남북한 교회의 만남의 자리는, 1989년 문익환, 임수경 등의 방북으로 인해 민간 참여의 길을 열게 하였고, 관련 시민단체들의 탄생을 예고하였습니다. 또한 이후 북한이 겪었던 심각한 경제난과 자연재해에 대해 인도적 차원의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1990)과 사랑의 의약품 보내기 운동(1991)등이 계속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북한 지원 사업으로 민간단체가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한 효시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통일운동은 주로 진보적 단체들이 주도하였던 것과 달리 1990년대 부터는 주로 보수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주로 활동했던 단체들은 남북나눔운동, 한민족복지재단, 굿네이버스, 월드비젼 등이 있습니다. 1997년에는 15개 교단와 기독교 단체가 참여한 한국기독교북한동포후원연합회가 결성되어 남북 분단 상황과 관련하여 기독교인들이 지고 있는 역사적 부채를 갚아나가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통일과 평화적 공존이 한민족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6. 21세기 한반도 평화의 씨앗
어릴때 들었던 미래의 이야기는 으레 '21세기가 되면 세상이 이렇게 바뀔것이다' 라고 끝나곤 하였습니다. 'Y2K 버그'로 인해 세기말적 종말론의 분위기를 맘껏 느낄 수 있었던 1999년 12월도 벌써 25년여 과거의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동안 지구촌 곳곳에서는 설혹 예상했다 해도 대비하기는 쉽지 않았을, 코로나 판데믹 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큰 혼란들을 겪어야 했으며,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헌정 질서를 내동댕이치고 내란을 일으켰으며, 그런 지도자를 옹호하며 탄핵 요구를 저지하려는 세력들에 맞서 수 많은 시민들이 겨울 내내 길거리에서 '국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구호를 외쳐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한반도의 한 쪽(남한)에서만의 일이었고, 그 반대편의 북한에서는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3년만인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지금의 남과 북은 길이 240km에 폭 4km의 '비무장지대(DMZ)'라 불리는 휴전선(국경이 아닌) 으로 가로막힙니다. 휴전선과 비무장지대는 7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남과 북 동포의 눈빛도 여전히 그대로일까요? 만약 백년 후, 남과 북이 어떠한 형태로든 통일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우리의 후손들은 6.25전쟁으로 부터 통일까지의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또 그 과정 속에서 남과 북의 교회 혹은 기독교 신앙인들이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 얼마나 애 써왔는지를 작은 것 까지 찾아내서 기억해 주려 할까요? 1947년 작곡가 안병원(1970년 캐나다 이민 후 2015년 작고)에 의해 만들어진 동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1989년 평양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씨가 부른 이후, 북한 내에서도 유명한 곡이 되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통일'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전쟁을 겪은 세대(80대 후반)와 그들을 부모로 둔 세대(70~50대)들 조차, 통일을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이제는 거의 하고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통일을 위해 '외세의 간섭 없이 남북 당사자 간의 자주적인 결정으로 이루'자는 것과 '무력 행사 없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하자는 것이 바로 '7.4 남북 공동 성명'의 취지입니다. 하지만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몇년 전 '통일은 대박'이라는 다소 성급한 표현이 당시 대통령에 의해 발표되었는가 하면, 북한이 내부적으로 붕괴될 시 누가 그곳에 먼저 들어갈 것인가 하는 자극적인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북한은 2024년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조선반도 내 두 개 국가' 라던가 '동족의식이 거세된' '적대적인 두 국가'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표현은 대체로 호전적이라 해도 내용에서는 과거와 별반 차이 없었던 것과는 달리, 남쪽을 향하여 '동족의식이 거세된' 이란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들은 여태까지도 '동족의식'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금 남쪽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다면 과연 북한을 '동포' '같은 민족' 등으로 인식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요?
분단된 두 개의 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일에 적지 않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통일을 이룬 독일의 경제 상황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통일 독일'이라는 열매는 동-서독 교회의 피땀어린 노력이 밑거름 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에는 남-북한의 통일은 차치하고라도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기 위해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앞장설 수 있는 것은 바로 남-북의 교회라고 생각됩니다.
현재 북녘 땅의 교회를 바라보는 남한 교회에는 다양한 시선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단이나 대형 단체들이 각자 저마다의 목적과 지향하는 바에 따라 활동 중일텐데 그런 다양한 노력이 언제쯤이면 온전히 하나의 결실로 맺어질 수 있는지는 오직 주님만이 아시며 또한 그 가능 여부 역시 은총과 섭리의 영역이겠지요.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두 개의 시선에 대해서만 간단히 짚어보겠습니다.
(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성명서
남-북간에 대북전단 및 오물풍선이 오고가며 일촉즉발의 상황을 이어가던 2024년 여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아래와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성명서) ‘남과 북 모두 서로간에 적대행위와 도발을 중단하라’ , 2024-10-15

비록 민간단체의 소행?이라고 해도 우리쪽에서 띄운 비행체가 3차례나 평양 상공에 진입하여 대북전단을 살포하였다는 북한 외무성의 항의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방부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지만, 우리쪽에서 지속적으로 대북전단을 살포해왔던 단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죠. 아직도 휴전 상태인 남-북의 상황 속에서, 어느 한 쪽의 과도한 반응은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지는 방아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한 행위를 버젓이 행하는 민간단체가 있다는 것도, 그것을 국가 행정력이 제대로 통제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이 교회가 국가의 통제를 받는 시대는 아니라고 해도 남-북한의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사안에 대해서는 국가와 교회 간에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아울러 아직도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생존해 있고, 우리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적성국으로 북한이 인식되고 있으며, 그들의 이념인 사회주의(공산주의)와의 대립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은 근-현대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기에, 북한의 교회와 협력을 하는 과정들 역시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남한 사회에 폭넓게 설명하고 공감을 얻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려면 먼저교회가 사회로 부터 현재 보다도 더욱 강한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겠지요.)
(2) 북한성결교회 재건프로젝트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는 북한에 위치한 성결교회를 재건하는 사업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사업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그간 김재성 목사님을 통하여 소개된 적도 있고 해서 설명은 생략합니다. 선교위원회 홈페이지에는 현재 북한 지역에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성결교회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실려있습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북한선교위원회 H.P.)
http://www.nkmc.kr/site/north-korean-church-reconstruction/
다만, 두가지 아쉬운 점이 느껴집니다. 북한의 성결교회들의 역사를 보면, "○○ 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로 되어 있고 그 결과가 대부분 동일합니다. 즉, 해방 전 일제강점기 시절, 총독부의 종교 탄압에 맞서 (당시엔 남-북의 구분 없이) 성결교회는 모두 자진 해산을 하였고, 해방을 맞아 남쪽의 성결교회는 재건이 되었습니다.(현재의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전신) 북한에서는 현재까지도 '성결교회'라는 독립된 교단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지역에 있는 성결교회를 문 닫게 만든 주체'는 일본(총독부)이었는데 이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또한 북한은 이미 남한과 별개의 국가인데, 과거 그 지역에 있었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북한과는 어떤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방향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과제들은 현재 이 활동을 추진하는 관련 선교단체에서 충분히 고려하며 진행해 나갈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3) 21세기 동방의 예루살렘을 꿈꾸며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던 유대민족은 앗시리아와 바벨론에게 각각 멸망 당하였고, 남유다의 수도이자 유대민족의 고향과 같던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됩니다. 이후 반쪽짜리 해방을 맞아 약 70여년 만에 고향인 예루살렘에 돌아온 그들은 아래와 같이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공동번역, 에스라 3:11~13)
11) "야훼님 어지셔라" 하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사랑 끝이 없어라"하고 화답하며 야훼께 감사찬송을 불러 올렸다. 온 백성은 야훼의 성전 터가 놓인 것을 보고 너무 고마와서 환성을 올리며 야훼를 찬양하였다.
12)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가문의 어른들 가운데는 이전 성전을 본 노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렇게 성전 터가 놓인 것을 보고 목을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13)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멀리까지 들렸는데 좋아서 떠드는 소리인지 슬퍼서 우는 소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포로로 끌려가기 전, 침략자들에 의해 파괴되기 이전의 성전의 모습을 어린아이였을 때 보았던 사람들이 인생의 말년이 되어 다시 고향에 돌아와 그 성전 터를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입니다. 기쁨이었을까요? 아니면 슬픔이었을까요? 분단된 이 땅에는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계시지만 교회 역시 분단된 역사를 함께 살아내고 있습니다. 비록 세상 힘의 논리에 따라 나라와 고향을 빼앗겼고 집과 교회는 파괴되었지만, 그 땅에 다시 집과 교회를 세우고 함께 살며 예배할 수 있다는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언젠가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이리저리 찢기고 부서지면서도 이 땅에서 정체성을 잃지않고 살아 버텨왔던 한민족. 한반도의 북쪽 지역을 통해 들어온 복음의 씨앗은 20세기의 백여년 동안 질곡의 세월을 살아왔던 우리 민족이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버티는데 필요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 저항의 세월 속에서 무엇보다 힘을 주었던 것은 바로 성경 속의 유대민족의 역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유대민족이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더라도 고향에 돌아와 다시 믿음의 공동체를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섭리와 은총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는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남과 북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 북한에 있는 교회에서도 함께 모여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때야 말로 에스라서에서 '이전 성전을 본 노인들의 울음'을 함께 터뜨릴 수 있는 날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민족이 겪어왔던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분단이라는 고통' 역시 주님의 섭리와 은총이 아닐까 합니다.
(공동번역, 시편 17:8) 당신의 눈동자처럼, 이 몸 고이 간수해 주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 주소서.
한반도 땅을 눈동자 처럼 지켜주셔서 갈등과 분단의 역사를 딛고 평화를 일궈내는 그 날까지 믿음을 가지고 굳게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이뤄낸 평화의 역사가 세계 곳곳에도 들불처럼 퍼져나가 세계가 평화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이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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