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변증 이야기 / 알리스터 맥그래스
2025-09-21 23:22:17
이택진
조회수   98

무더웠던 날씨가 어느덧 자취를 감춰가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큰나무교회에도 어김없이 '도전30일-5북스'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실은 이 행사가 시작되기 얼마 전, 꼭 읽고 싶었던 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와 변증... 써 보고 싶은 마음 보다 시작에 대한 부담이 더 컸던 주제였습니다.

 

 

[기독교와 변증]


‘기독교(개신교)는 변증의 종교’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변증(辨證)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지요. 제 기억 속 '변증'이란 용어는 학창 시절 유난히 따분하게

느껴졌던 윤리 수업 시간에 배웠던 '헤겔의 사상에 유물론을 더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만들었던 마르크스' 정도가 첫 기억인 듯 싶습니다.

 

변증과 비슷한 용어로 변론(辯論), 혹은 변호 등이 있습니다. 변론은 '법적, 혹은 공식적 절차에서

주로 사용되며, 논쟁에 가까운 의미로 주로 상대방과 대립하는 구도'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쉽게 설명해 보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이야기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용어 자체가 쉽지 않으니 이 글에서는 '설득'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서로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함께 먹을 점심 메뉴를 정하는 정도'의 가벼운 주제라면 각자가 추천하는 메뉴를 차례대로

'모두 먹으러 가는 훈훈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자신의 가치관을 상대가 받아 들여야

대화가 끝나는 상황이라면, 결국 상대를 설득하지 못함으로 인해 좌절감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상대가 나에게 설득 되었는가(혹은 내가 이겼는가)?' 라는 '결과'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에는 결과 뿐 아니라 '설득의 과정', 그리고 '나 스스로 옳다고

느끼는 사상(혹은 신념)'이 '왜' 옳은지에 대한 이유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즉,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흔히 '철학'이라는 학문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진리를 찾는 것' 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진리"

그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과정 (혹은 방법)을 찾는 것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철학의 역사 자체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에 대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라 설명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중세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와 성경의 가르침 = 진리'라 정의하였습니다.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출발점으로 하여 이성을 통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진리에 도달하고자 했으며,

헤겔에 이르러서는 ‘모순을 통해 진리를 찾는 방법’, 즉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정의하였습니다.

한편, 20세기에 이르러 맑스의 유물론의 개념을 도입하여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이 만들어졌으며,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인간의 능력으로 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바탕으로 하나님과 인간, 계시와 이성 등의 대립과 긴장 구조를

강조함으로써 그의 신학은 ‘변증법적 신학’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산으로 가버렸죠?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철학에서의 ‘변증’이 아니라

기독교가 ‘변증의 종교’라 불린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볼까요?

(요즘 유행하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믿음을 경험적, 역사적, 철학적 근거를 통해 변호하며,

단순히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실존적인 신앙임을 주장하”기 때문이라는군요.

(by Perflexity)

 

사실 신약성서에 기록된 여러 내용을 봐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과 초대 교회는

외부의 비판, 이단, 의심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복음을 변호하는 데 힘써야 했으며,

이는 초대 기독교가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전술'이자, 선교의 '전략',

즉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이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기독교 신앙을 잃은 이들이나 회의론자에게

복음의 진리성과 신뢰성을 설명할 때는 여전히 초대교회 사도들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내가 신앙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나 스스로도 납득시키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 변증이란?]

(변증이란 무엇인가 / 알리스터 맥그래스 / 복 있는 사람)

 

"이 책은 21세기 현대사회의 질문에 응답하면서 기독교 진리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변증하는

최적의 교과서다." (@띠지)

(책을 안 읽어봐도 그 내용에 대해 한 줄 요약이 필요할 땐 '띠지'를 잘 읽어보면 됩니다!)

 

저자인 맥그래스는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 시대 최고의 저술가 중 한 명이죠.

기독교가 왜 ‘변증의 종교’로 불리는지의 근원적인 설명에서부터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기독교 변증의 세부적인 방법론’까지 한 권으로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저도 이 책을 구입하고 목차와 서론 그리고 결론부터 읽었으며, 세부 내용은 앞으로 천천히 읽어나가려 합니다.)

(하나의 책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두 번째 소소한 팁은 목차를 잘 읽는 것입니다. 첫 번째 팁은 띠지 잘 읽기!)

 

<목차>

1. 변증이란 무엇인가
2. 변증 : 몇 가지 역사적 주제들
3. 믿음의 합리성
4. 기독교 신앙과 인간 상황의 연결
5. 신앙의 접촉점 탐색
6. 내러티브 변증: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
7. 청중의 중요성
8. 질문에 답변하기 : 몇 가지 변증적 논쟁
9. 현인에게 배우기 : 변증 사례 연구

 

1장의 '변증이란 무엇인가'에서는, 먼저 '변증'이라는 용어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할 과제를

이야기합니다. 변증이 교회와 학계 양쪽에서 '엇갈리는 평판을 받고 있'고,

'변증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회에 나오도록 '설득하는 공격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전개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광범위하고 풍부한 작업'임을

설명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확증'하고 세상과 '소통' 함으로써 (상대를) '매료'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합니다.

 

"진리는 설득하지만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

 

기독교 초기의 변증가들은 그들만의 공동체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더 넓은 문화 속에서

그들의 비판자들과 씨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을 보면

(저자가 생활하는 서구 세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와 더 넓은 문화 사이의 '단절이 더 심해지고 있'으며,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이어온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신앙이 더 이상 삶에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함으로 인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세상에 쓸모 있는 기독교'가 되려는 방법으로서 변증을 '학문'이자 '기술'로 바라보라고

조언하고 있는데, 따라서 이 책에는 변증의 이론적 측면과 함께 가장 잘 실천하는 방법 및

주요 실천가들의 사례들도 싣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변증의 세 가지 주요 요소(세상의 질문과 관심사에 응답하고,

기독교가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하며, 신앙의 언어로 풀어 주기)와 다섯 가지 유형(증거주의, 전제주의,

합리적 변증, 경험적 변증학, 내러티브 변증)에 대해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상세한 내용은 책의 몸통 부분에 해당합니다.

 

또한 변증이 왜 중요하며, 어떻게 잘못될 수 있는가에 대한 주의 사항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기독교의 독특한 '관습'에 대한 비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변증'이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국교가 되고 유럽 사회의 지배적 종교가 된 이후

비판자들의 관심은 관습에서 '신념'으로 옮겨졌으며 본질적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철학자들 역시

기독교 사상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변증을 하지 않으면 변호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고 결국 '기독교 변증' 역시

혹독해지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더욱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혹독한 환경은 비단 기독교만의 위기는 아니며 수학과 논리의 세계를 벗어난 모든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 신념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종교들 역시 기독교와 비슷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죠.)

또한 몇몇 피상적 진리들은 증명될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의 의미나 가치' 등등, 세상에서조차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듯, 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변증이 잘못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증거가 없으니

'창조론은 거짓'이라는 주장을 진화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과학자 중에서는 '진화론'으로 세상의 창조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양식 있는 과학자'라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를

계속 찾아가고 있으며, 또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을 뿐입니다.

G. K. 체스터턴은 "현상이 종교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현상을 설명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은 '증명의 대상'이 아닌,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변증과 전도의 관계에 대해 '변증이 "대화"라면, 전도는 "초대"의 경향이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대화"가 길어진다고 상대가 마음을 다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초대" 받은 사람은 공동체의 일원이 될 가능성이 높죠.

 

 

[성경 구절들]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변증' 하면 생각나는 몇 개의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1) 이사야서 1장 18절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이사야 1:18)

 

이사야서 1장은 자식처럼 사랑했지만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을 거역한 유다와 예루살렘을

꾸짖는 내용으로, 바로 직전 17절에서는 선행과 정의를 구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변호해 주라 하셨는데, 이어진 18절에 '서로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몇몇 주요한 영어 성경에서도 "let us reason together"로 되어 있어

'논리적으로 따져본다'라는 의미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주홍빛 같은) 죄를 지은 것도 유다(인간)이고, (죄를 용서 받고)

흰 눈처럼 되는 것도 유다(인간)이며,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누구에게

'변론'한다는 것인지?

그냥 벌주시면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잘못하였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고,

또 죄를 없애주심으로 인해 다시 깨끗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려는

'하나님의 Big Picture'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 10:25~37)

"...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너~무 유명한 이야기죠? 성경(주로 구약의 율법서를 중심으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율법 교사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예수께 물으러 왔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쉐마의 말씀을 줄줄이 암송하는 그를 예수님은 칭찬

하십니다. 그런데 율법 교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질문을 하나 더 하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다 듣자마자 율법 교사는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 '진짜' 이웃입니다."

율법 교사는 다만 자신도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마음의 결심'을

해 본 적 없었을 뿐, 그런 판단을 내리기 위한 (성경) 지식은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그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방향만 제시해 주셨을 뿐...

이 역시 '변증'의 한 방법이 아닐까요?

 

(이전에 썼던 글 ⇒) "만약에 ChatJESUS가 있었다면?"

 

(3) 허메와 쓰스(사도행전 14:12)

"... 바울은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개역개정판'에서는 헤르메스나 제우스처럼 귀에 익숙한 명칭으로 번역되었지만,

'개역판'에서는 헤르메스가 '허메', 제우스가 '쓰스'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 유년주일학교 때 '제우스' 이야기를 들었던 희미한 기억이 남아있었는데

성경이 개정되어서였는지 오랜 세월 '허메'를 잊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방인의 언어를 통역하는 사람(헤르메네우스, hermeneus) 또는 숨은 의미를

해석하는 학문인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용어의 어원이 되는 '헤르메스'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라니 바울은 얼마나 똑똑하면서도 말도 잘했던 것일까요?

어린 시절부터 유대교 경전과 헬라 철학을 배웠고, 다메섹 가는 길가에서 극적인 만남을 통해

회심한 바울이 신약성경의 절반(27권 중 13권) 가까이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며, 이천년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기독교 변증가였다는데 의심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의 그 놀라운 '변증'의 능력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흔히들 그의 뛰어난 지식과 더불어

선교에 대한 열정, 불굴의 의지, 순종하는 마음 등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것들에 더하여 그의 모범적인 생활 모습도 큰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다른 지역 선교에 가장 큰 장애 요소인 재정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하였으며,

율법을 준수하는 생활로 인해 윤리적 삶의 모범을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선교지의 여러 지체를 사랑으로 대하였습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에 감복한

사람들이었기에 그의 가르침 역시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기독교 변증'을 생각하며]

 

오래전, 기독교와 변증에 대해 생각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가야 할 길을 몰라 여러 권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그 고민은 현실 생활 중에도 항상 따라다녔고, 세월이 한참 지난 어느 날,

한밤중 바다 한가운데에서 멀리 등대 불빛을 찾은 듯싶을 찰나에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혹 ‘기독교 변증’이란 키워드로 세상을 보게 되면, 성경 속 특정 주제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경우도 보이고, 때로는 논쟁하여 승리하는 '전술적 방법론'만이 ‘기독교 변증’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후자의 예로서 기독교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홀*컴*)을 최근 알게 되었습니다.

‘길지 않은 정해진 시간(10분)에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내용인 것 같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즉문즉답의 형태로 복음을 전하는 능력...

과연 이 시대에 얼마나 요구되고 있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의 시대에 살고 있을까요? 과학자들은 우주가 약 138억 년 전,

빅뱅(대폭발)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을 것이라며 그 증거들을 찾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물질 간에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萬有引力)인 중력의 원리도 찾고 있으며,

모든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로 알려진 원자를 한 번 더 쪼개어 발견한 '양자'가

지금까지의 지식과 경험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며 '양자역학'이란 체계를 새롭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현상의 기본 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자에 관한 연구나, 뇌 속에서 의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조차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런 광대한 지식을 기계 속에 담아 인간의 사고능력을 모방할 수 있는 인공지능,

더 나아가 인공 생명체가 언제 탄생할지 알 수 없는 시대입니다.

한편으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전쟁과 착취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어놀' 만큼 평화로운 세상을 인류는 갈구하지만,

그 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시대에 '기독교'가 세상을 향해, 무엇을 어떻게 외쳐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변증'의 참 목적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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